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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월 평화칼럼] ‘오징어 게임’이 일깨워 준 연민

[김승월 평화칼럼] ‘오징어 게임’이 일깨워 준 연민

김승월 프란치스코(시그니스서울/코리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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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4 발행 [1637호]


황당한 우화다. 456명의 게임 참가자 중에서 최종승자 단 한 명에게 456억 원의 상금을 몰아주고 탈락한 나머지 모두를 죽인다. 사람 목숨으로 장난치는가 싶어 보기를 주저했었다. 1억 4000만 명 넘게 시청했다는 소식에다 ‘한국문화 쓰나미’라는 외신의 평까지 나왔다. 무엇이 담겨 있길래 전 세계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을까?

참가자들은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패배자들. 파산하거나 죄짓고 내몰린 이들이다. 한몫 잡아야 하는 절박한 처지다. 게임의 틀은 약육강식의 사회구조와 비슷하다. 살아남는 방법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배신, 협박, 유혹, 거짓말, 집단 따돌림이 이어진다. 죽고 사는 게임이라는 것만 빼면 우리 사회의 판박이다.

6차례의 게임이 치러질 때마다 패한 이들은 목숨을 잃고, 살아남은 자들은 목돈에 한발 다가선다. 위선자의 가면이 벗겨지고 야비한 민낯을 드러낸다. 사이코패스는 악마의 모습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경쟁자를 한 명이라도 줄이기 위한 집단 살육이 벌어지고, 발에 걸리는 상대는 죽음으로 밀어 넣는다.

지옥에도 햇살은 깃들까. 살벌한 게임 속에서 인간의 선한 모습이 언뜻언뜻 내비친다. 큰 죄를 저지르면서도 작은 선행은 베푼다. 죽음 앞에 내몰린 처지에서 이웃과 아픔을 나누기도 한다.

주인공 기훈은 파업하다 정리해고 당한 백수다. 아내에게 버림받고, 좌판 장사하는 늙고 병든 어머니에 얹혀산다. 푼돈이라도 쥐면 경마장에 달려가는 못난 인간이다. 하지만 남이 겪는 아픔에는 앞뒤 재지 않고 나선다.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오지랖만 넓다. 그가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탈북녀 새벽이에게 건넨 말이다. “원래 사람은 믿을 만해서 믿는 게 아니야. 안 그러면 기댈 데가 없으니까 믿는 거지.”

2인 1조 경기에서 힘센 이들끼리 짝을 지을 때다. 노인과 여성 같은 힘없는 이들은 따돌려졌다. 새벽이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지영에게 손을 내민다. 지영은 자기 어머니를 살해한 양부를 죽였다. 교도소에서 나와 갈 곳이 없어 찾아온 여기다. 이곳에서 나간들 누구 하나 맞아줄 사람 없다. 보육원에 맡겨진 남동생을 찾으려고 애태우는 새벽 이에게 일부러 져주고 죽음을 맞는다. “고마워, 나랑 같이 해줘서”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기훈은 외톨이 노인과 손잡았기에 위기를 벗어난다. 순서를 정할 때도 이리저리 떠밀린다. 애절한 부탁에 마지막 선택마저 양보한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긴다. 드라마는 말한다. 배려는 욕심을 이기고, 남을 위하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라고.

따돌려진 이에게 건네는 따뜻한 손길이나 경쟁자마저 보듬는 넉넉함. 그런 착한 마음의 씨앗은 누구나 지니고 있다. 욕망으로 더럽혀지고, 경쟁으로 가려져 있어 알아채기 힘들 뿐이다. 맹자는 불쌍한 것을 보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태어난다고 믿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수녀 출신 작가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은 기독교, 불교, 유교와 같은 종교의 기본 정신을 연민(compassion)이라고 했다.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仁)을 그렇게 보았다.

오징어 게임의 잔혹한 이야기를 끝까지 보게 한 힘은 연민 아닐까. 추악한 탐욕 사이에 해맑은 마음이 살짝 보였다. 인간에게는 그런 따뜻함이 있다는 것을 되새기면서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연민과 자비는 참으로 풍성합니다.”(야고 5,11 공동번역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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