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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올 주교가 세 차례의 기회 차버리면서 조선 입국 계속 늦어져

페레올 주교가 세 차례의 기회 차버리면서 조선 입국 계속 늦어져

[신 김대건·최양업 전] (32)두 신학생의 부제 수품과 조선 입국의 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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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1 발행 [1644호]
▲ 양관성당은 1838년 만주교구가 북경교구로부터 분리 설정될 당시 만주 전체를 사목하던 주교좌 성당이었다. 초대 교구장인 베롤 주교는 양관에 대성당을 신축하고 남만주 지역의 선교 중심으로 삼았다. 1843년 12월 31일 이 성당에서 조선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서품식이 거행됐다. 이 미사에는 최양업, 김대건 그리고 조선 선교사 메스트르 신부도 참여했다. 사진은 문화혁명으로 파괴되기 전 양관 주교좌 성당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최양업ㆍ김대건 부제 되다

신학생 김대건은 1844년 2월부터 두 달간의 두만강을 통한 조선 입국 탐사를 마치고 그해 4월 페레올 주교와 메스트르 신부가 있는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이에 앞서 요동반도 백가점에 남아있던 메스트르 신부는 1843년 12월 31일 개주 양관에서 거행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서품식에 참여한 뒤 1844년 1월 14일 최양업과 함께 소팔가자로 갔다. 메스트르 신부는 다시 최양업과 김대건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두만강 입국로 탐사를 마치고 돌아온 김대건은 신학 공부에 합류해 두 달 후 최양업과 함께 6월 2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에 차부제품을 받았다. 삼위일체 대축일은 전례력으로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이다. 1844년 춘분이 3월 21일(음력 2월 3일)이었고, 춘분 후 첫 보름(과월절)은 4월 2일이었다. 과월절 후 첫 주일인 1844년 주님 부활 대축일은 4월 7일이다. 주님 부활 후 50일 되는 날이 성령 강림 대축일로 5월 27일이다. 따라서 최양업과 김대건이 차부제품을 받은 삼위일체 대축일은 6월 2일이 된다.

이후 둘은 1844년 12월 초에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는다. ‘최초’와 ‘처음’, ‘첫’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우리 사회 시류에 따른다면, 한국 교회 한국인 첫 성직자는 최양업 부제이고, 한국 교회 한국인 첫 사제는 김대건 신부라 하겠다. 그럼, 최양업과 김대건은 언제 어디에서 부제품을 받았을까? 안타깝게도 부제 서품식 일자와 장소는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페레올 주교는 1844년 12월 10일 심양에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는 지금 부제입니다”라고 적었다. 따라서 최양업과 김대건은 적어도 1844년 12월 10일 이전에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그럼 장소는 어딜까? 페레올 주교의 이 편지를 근거로 몇몇 학자들은 최양업ㆍ김대건의 부제 수품 장소를 ‘심양’이라고 본다. 페레올 주교는 이다음 편지를 1844년 12월 20일 요동 개주에서 썼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부제는 심양에서 앵베르 주교의 조선 입국로를 따라 1845년 1월 1일 봉황성 변문에 도착했다. 심양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페레올 주교가 조선 입국을 성공적으로 이루겠다는 결심을 하고 1844년 12월 초 소팔가자를 떠났고, 12월 10일께 심양에서 최양업ㆍ김대건에게 부제품을 주고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로 보고했다. 그리고 부제품 이후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부제는 변문으로,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두만강을 통한 조선 입국을 시도하기 위해 다시 소팔가자로 갔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견해대로라면 아마도 심양에서 최양업ㆍ김대건의 부제품이 거행된 곳은 1844년 페레올 주교가 조선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났던 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집은 아마도 앵베르 주교가 묵었고, 조선 교회 자금과 물자를 보관하던 송씨의 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사학계 정설은 최양업ㆍ김대건이 1844년 12월 10일 이전에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받았다는 것이다. 굳이 심양까지 가서 부제품을 거행하고, 또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소팔가자로 되돌아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페레올 주교가 1840년 12월 말부터 4년째 거처한 안전한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거행하는 것이 누가 봐도 상식적인 일이라 하겠다.


▲ 페레올 주교.

▲ 심양은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기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 입국을 위해 머물렀던 주요 거점 가운데 한 곳이다. 사진은 심양 고궁 전경.



페레올 주교의 기행(奇行)

1845년 1월 1일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해 봉황성 변문에 도착한 후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조선 입국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듣고 바로 포기하고 만다. “그 신자가 이번에도 제 입국이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때에, 저는 낙담해 기진맥진했습니다. 조선의 수도를 출발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직전에 의주에 있는 관문까지 순조롭게 온 7명의 신자 가운데 3명만이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심하게 의심하면서 집요하게 질문을 하며 못살게 구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자 다른 4명의 신자는 말을 몰고 제가 입을 옷을 가지고서 오던 길로 서둘러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상황이 그러하니, 제 조선 입국은 불가능해졌고, 연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다른 길로 조선 입국을 결행할 수 없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반도로 몰아낸 이래 두 민족은 서로 극심히 적대시합니다.”(페레올 주교가 1845년 5월 25일 마카오에서 전교후원회 중앙 참사회에 보낸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에게 조선인 길 안내인들과 함께 입국해 배를 구해 자신을 데리러 중국 강남으로 올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는 김대건 부제와 조선인 길 안내인들과 헤어진 후 마카오로 갔다.

페레올 주교는 왜 이다지도 쉽게 조선 입국을 포기했을까? 박해 시기 그 어떤 선교사도 안전하게 조선에 들어간 적이 없다. 선교사들의 입국을 도운 그 어떤 조선인 신자들도 “지금은 안전한 때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지 않았다. 선교사와 그를 맞이하는 교우들 모두 목숨을 내놓고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누구도 안전한 출입국과 활동을 보장하는 비자를 받고 조선에 오지 않았다.

그런데 왜 유독 페레올 주교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까?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만한 페레올 주교의 태도는 ‘기행’(奇行)이라고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지금은 감시가 심해 주교를 입국시키기 어렵다고 조선 신자들이 부정적 태도를 보이자 그들에게 “교황께 이 사실을 보고하겠다. 여러분 모두를 파문시키겠다”고 까지 위협하면서 조선 입국의 걸림돌들을 스스로 치워갔다. 그리고 국경에서 자신을 데리러 올 조선 신자들을 기다리겠다며 봉황성 변문에서 2㎞ 떨어진 곳에 집 한 채를 마련하기도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와 조선 입국을 위해 조선 밀사들을 다그칠 때 김 프란치스코도 유진길, 남이관, 조신철과 함께 있었다. 페레올 주교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위해 보인 태도의 반의반, 아니 손톱만큼, 겨자씨만큼이라도 보였다면 김 프란치스코는 주교의 동행 입국을 시도했을 것이다. 사실 그와 동행했던 현석문과 이재의(토마스) 등 4명은 만약을 대비해 평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페레올 주교를 데리고 의주까지 넘어와 신자들이 구한 집에서 머물고만 있었다면 평양의 신자들이 다시 와 그를 안전하게 모시고 한양까지 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페레올 주교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김 프란치스코의 말만 듣고 배를 타고 마카오로 갔다. “낙담해 기진맥진했다”고 보고하면서….

페레올 주교는 1842년 말부터 1845년 1월 초까지 적어도 세 차례 조선에 입국할 기회가 있었다. 이 황금 같은 기회 모두를 페레올 주교는 스스로 내찼다. 변문과 의주의 ‘압록강 루트’뿐 아니라 훈춘과 경원의 ‘두만강 루트’를 포기했다. 페레올 주교는 그 스스로 육로를 통한 조선 입국을 포기한 것이다. 조선 선교사 메스트르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이러한 미지근한 태도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은 지금 입국하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무한한 자비를 베푸시어 제가 바라는 바대로 저를 무사히 도착하게 해주시면 저는 페레올 주교님을 더 안전하게 입국시킬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도우시면 우리의 작은 양 떼가 모두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2년 11월 14일 백가점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지난겨울에는 희망을 좀 가졌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교우들은 그들의 새 주교나 선교사를 입국시키기 위해 북쪽 국경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은 자신의 입국도, 선교사의 입국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계획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고, 첫눈에도 매우 모험적으로 보였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상당히 슬퍼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들은 20일간 여행을 하고 국경에서 한 달을 기다렸습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4년 3월 28일 소팔가자에서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페레올 주교는 애당초 육로를 통한 조선 입국을 원치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에 관해선 다음 호에 좀더 다루겠다. 어쨌든 페레올 주교의 소심한 결정 때문에 김대건 부제는 조선에서 배를 구해 상해로 가게 된다. 목숨을 건 항해를….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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