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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자 수녀의 하느님의 자취 안에서] 28. 담대하게

[조경자 수녀의 하느님의 자취 안에서] 28. 담대하게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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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30 발행 [1648호]
겨울철 저녁은 참 빨리도 찾아온다. 밤도 낮처럼 밝은 도심의 거리에서 문득 떠오른 달빛이 정말 반가웠다. 제아무리 밝은 가로등이 많아도, 저 높은 빌딩의 불빛과 십자가의 네온사인이 곳곳에서 번쩍번쩍 빛나도, 생각지도 않게 그리운 벗의 얼굴 발견한 듯 나도 달도 멈추어 한참을 바라봤다. 그저 감사드리는 시간이었다.

며칠 전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무리 궁금하셔도 연락 한 번 안 주시는 어머니께서 전화를 주셨기 때문에 나는 놀라서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께서는 조카 결혼식에 입으실 한복을 찾고 있으신데 혹시 내가 치웠는지 물으셨다. 지난해 휴가 때에 대청소를 해드리고 왔기 때문에 내가 어머니의 오래된 한복을 버렸을까 봐 걱정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한복이 아버지께서 사주신 첫 번째 한복이라 어머니께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기 때문에 곧바로 대답해드릴 수 있었다. 이후 어머니는 “그런디 서울에서 잘 지내고 있는가? 농사일을 안 하게 돼서 덜 고될 것 같은디 얼마나 힘들어? 내가 우리 아가 보고 싶고 궁금해서”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아버지께서 사주신 그 소중한 한복은 나에게 전화하기 위한 구실이었고 내가 낯선 서울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셨던 거다. 가슴에 먹먹함이 올라왔지만 잘 참고 “엄마 사랑해요”라는 말씀으로 안심시켜 드렸다.

어머니는 막둥이인 나를 ‘울 애기’라고 부르셨다. 물론 요즘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 수녀님’이라고 부르시기도 한다. 어머니에게 나는 끝까지 ‘아가’일 것이다. 몇 년 전 휴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덜컹했다. 너무나 작아지시고 연로해지신 두 분의 뒷모습이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 수녀원에 돌아오자마자 전화를 드렸다. “엄마, 저는 다시 태어나도 엄마, 아버지께 태어나고 싶어요.” 어머니께서는 “엄마도 울 애기를 낳을 거여”라고 하시며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가, 파도는 휘몰아쳐 와서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릴 것 같어. 어렵고 힘들지. 그런디 파도는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저만치에서 다시 밀려오는 거여. 파도가 또 밀려올 것을 알고 파도타기를 하는 거여.” 내가 어떻게 지내기를 바라시는지 드러나는 말씀이었다. 파도타기를 하라…. 사실 이 파도타기는 내 삶 안에서 문득문득 이루어지고 있다. 파도에 어쩔 수 없이 떠밀리는 것과 다르게 파도 자체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공생활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군중으로부터 듣기 좋은 말로 칭찬도 받으시고, 어처구니없는 시험에도 들으시고, 수없이 판단 받으신다. 심지어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내몰려지신다. 그런데 이럴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담담하게 그들의 손을 빠져나오신다. 어느 누구의 판단에도 걸려들지 않고 파도 물살처럼 밀려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기도 안에서 볼 때마다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파도 이야기가 떠오른다. 곧 더 큰 물결이 다가올 것을 알지만 지금 들이치는 파도를 담대히 맞이하는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두루마리에 쓰여진 말씀이 모두 당신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지금 여기에서’ 말씀을 이루신다. 말씀을 살아 있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세례받은 우리 모두가 초대되었다. 그러니 오늘 나는 이 두루마리에 쓰인 말씀이 나에 관한 말씀이고, 너에 관한 말씀이며, 우리에 관한 말씀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저 2000년 전 나자렛 마을의 예수께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그것을 담대히 살아서 파도를 계속 맞이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밀려들 파도를 담대히 맞이하는 오늘의 예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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