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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올 주교, 강경에서 우리말 배우며 조선 교회 상황 파악

페레올 주교, 강경에서 우리말 배우며 조선 교회 상황 파악

[신 김대건·최양업 전] (42)강경에 머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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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발행 [1656호]
▲ 조선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는 강경에서 두 달간 머문다. 김대건 신부도 강경 구순오의 집에서 임성룡과 함께 배를 사들이기 위해 한달 남짓 유숙한다. 대전교구는 이를 기념해 강경에 성지를 조성하고 이들을 현양하고 있다.



새 배를 구하라

“선원 두 사람이 우리를 업어다 순교자들의 땅에 내려놓았습니다. 제 착좌식은 그리 화려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일을 소리 없이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야음을 틈타서 앞장서서 가는 신자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집은 흙으로 지어진 초라한 초가였습니다. 방이 두 칸 있었고, 높이가 3피에(약 96㎝)인 문이 있는데 이 문은 창문 역할도 합니다. 이런 방 안에서는 사람이 서 있기 어렵습니다. 너그러운 그 집 주인은 우리에게 숙소를 내주려고 사람을 시켜서 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페레올 주교가 1845년 10월 29일 강경에서 파리외방전교회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가 밝힌 것처럼 ‘강경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곳에 닿은’ 김대건 신부 일행은 이 지역 신자 집에 은신했다. 이튿날,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 임성룡만 남고 나머지 일행은 은밀히 집을 빠져나와 각자 제집으로 돌아갔다. 다블뤼 신부는 그를 찾아온 교우를 따라 상복 차림으로 공동 교우촌으로 갔다. 다블뤼 신부는 이 교우촌에서 우선 우리말을 배우기로 했다. 황산포에서 공동 교우촌까지는 걸어서 약 9시간이 걸렸다.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매우 호젓한 이곳에는 7가족 30~32명 신자가 땅을 경작하고 살고 있었다.(다블뤼 신부가 1845년 10월 25일 공동 교우촌에서 파리외방전교회 동료 사제들에게 보낸 편지 참조)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를 모셔야 하기에 주교 곁에 있어야 했지만, 임성룡은 왜 집으로 가지 않고 남았을까? 그 답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된 이들의 진술에서 찾을 수 있다. 뱃사람 엄수는 병오년 5월 20일(양력 1846년 6월 13일) 황해 감사 김정집에게 “저는 임성룡과 한마을에 사는데, 작년 겨울에 성룡이 새로 배를 사서 제가 그 사공이 되었습니다.…성룡이 417냥으로 배를 매입했고, 또 환전을 얻어서 저와 함께 은진 강경이로 내려가 쌀 40여 섬과 남초(담배) 50척을 사 왔습니다”라고 진술했다.(「해서문첩록」 병오 5월 엄수 1, 2번째 공초 내용 참조) 같은 날 임성룡은 “400냥으로 배를 산 일과 강경이 환전은 모두 대건의 요구를 들어준 데서 나온 것이니 과연 엄수가 진술한 것과 같습니다”라고 밝혔다.(「해서문첩록」 병오 5월 임성룡 3번째 공초 내용 참조)

이들 진술대로라면 임성룡은 라파엘호를 대신해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돕고, 선교사들의 물품을 실어나르고 편지와 보고서를 전달할 새 배를 구하기 위해 강경에 남았던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다블뤼 신부가 뒷받침해 준다. “우리는 우리 배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절대로 알려지지 않게 하도록 배를 없애버릴 궁리를 해야만 합니다.”(앞의 편지)

페레올 주교는 이번 여행을 통해 바닷길을 통한 선교사 영입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바닷길을 통한 연락망을 구축할 수 있을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자들 가운데 항해술이 능한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중국으로 배 한 척을 보내는 것은 다만 최후의 수단으로, 살아나 갈 방도가 따로 남아 있지 않을 때에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경우에 기적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모험적인 일이 이루어지려면 기적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선교사를 입국시킬 방법으로 변문 길을 통한 입국을 다시 시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페레올 주교가 1845년 12월 27일 서울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 신부와 임성룡에게 새 배를 구하도록 지시한 것은 그가 밝힌 것처럼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함일 것이다.



강경에서 한양으로

김대건 신부가 1845년 11월 20일 한양에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귀국 편지를 쓴 것으로 보아 김 신부는 임성룡과 함께 한 달 남짓 강경에서 머물면서 배를 마련해 그 배를 타고 11월 20일 이전에 상경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페레올 주교는 1845년 12월 27일 한양에서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수도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됩니다”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강경에 도착한 10월 12일부터 12월 중순에서 하순까지 2개월여 이상 강경 유숙지에서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라파엘호에 같이 탔던 조선인 신자들이 하나같이 페레올 주교에게 “이 나라의 수도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단언해 주교는 강경에 머물다가 사람들의 왕래가 비교적 줄어든 한겨울에 한양으로 몰래 가기로 했다.

페레올 주교는 강경 유숙지에 은신하면서 우리말을 배우고, 조선 교회가 처한 상황을 우선으로 파악했다. “이 선교지에서 모든 것을 새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동료 신부님들이 계셨을 때보다 활동하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왜냐하면, 선교 활동에 대해 조정이 더 많은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고, 또 박해로 인해 신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숨어 살게 됐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이리저리 사람을 보내 신자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는 일일 것입니다. 만일 칼날이 우리에게 시간 여유를 좀 준다면, 저희가 와 있다는 비밀이 탄로 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면서, 슬픔에 빠진 양 떼를 사목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페레올 주교의 앞의 편지에서)

▲ 라파엘호를 타고 강경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곳에 닿은 김대건 신부는 뱃사람 임성룡과 함께 이 지역 신자인 환전객주 구순오의 집에서 약 한 달간 유숙했다. 사진은 구순오의 증손녀의 증언으로 밝혀진 구순오의 집 터로 현재 일반인이 현대식 가옥을 지어 살고 있다. 출처=논산시



강경 유숙지는 어디일까

그럼, 페레올 주교가 2개월여 간, 김대건 신부가 1개월 남짓 머문 은진 곧 강경 유숙지는 어디일까? 김대건 신부는 1846년 6월 26일(병오년 윤 5월 3일) 포도청 네 번째 공초에서 “저는 교우를 만나 보고자 작년 8월에 이재용(이재의 토마스를 말함), 임성룡과 함께 은진 구순오의 집에 가서 머물렀는데, 임가가 배를 사서 함께 배를 타고 돌아왔으므로 호서의 산천을 역력히 기억하여 그렸습니다”라고 진술했다. 김대건 신부는 그와 임성룡이 묵은 강경 유숙지가 구순오의 집이었음을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하지만 페레올 주교가 머문 강경 집은 이 글 맨 앞에서 소개했듯이 방 두 칸짜리 작은 초가였다. 따라서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가 강경에서 머문 곳은 한 집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집임을 짐작할 수 있다. 환전객주 구순오의 집에는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기에 페레올 주교는 구순오가 마련한 안전 가옥에서 생활했을 것이 분명하다. 페레올 주교는 상해에서 떠나기 전에 산 유럽산 아마포를 구순오에게 내놓고 2배의 수익을 올려 그 돈으로 생계비를 충당했다. 선교 자금으로 가져온 중국 은괴도 구순오의 도움으로 조선 은괴로 녹여 현금화할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가 머문 구순오의 집은 오늘날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홍교리 101-1, 102-1, 103-1 일대이다. 고 오기선 신부가 1965년 10월 3일 구순오의 증손녀 구용녀(안나)씨의 증언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구순오의 집은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후 구순오 가족이 피신하면서 압수, 매각됐다.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한양 거처를 완벽하게 준비한 후 강경으로 내려왔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는 1845년 12월 중ㆍ하순 약 200㎞의 길을 걸어서 한양에 들어왔다. 둘은 한양에 거주하는 신자들을 사목하는 일을 시작하면서 그해 연말 두만강을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하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맞을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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