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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병간호에 지쳐 우연히 간 성당에서 들려온 예수님 음성

남편 병간호에 지쳐 우연히 간 성당에서 들려온 예수님 음성

[허영엽 신부가 만난 사람들] (17) 시인 신달자 엘리사벳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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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7 발행 [1658호]
▲ 신달자 시인은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큰 고통을 겪었고, 우연한 기회에 성당을 찾아 신앙을 받아들이게 됐다. 시인은 성당에 들어서자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위로를 분명히 느꼈다고 고백했다.



“아침에 창을 열었다/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그저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상용어들을 안아 볼을 대고 싶다

… 가슴을 울렁거리며/ 입이 근질근질 하고 싶은 말은/ 작고 하찮은 날씨 이야기 식탁 위의 이야기/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뭐 그런 이야기/ 발끝에서 타고 올라와

가슴 안에서 쾅 하고 울려오는/ 삶 속의 돌다리 같은 소중한 말/ 안고 비비고 입술 대고 싶은/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 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떠먹이고 싶다.” (신달자 시인의 ‘여보 비가 와요’ 중)





신달자(엘리사벳) 시인이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어느 날 식당에서 혼자 저녁 식사를 하다 떠오른 시상을 옮겼다고 했다. 소소하고 특별하지 않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라는 것을 느끼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시인의 말이 공감이 갔다.

신달자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사실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를 통해서였다. 이 소설은 능력 있는 젊은 여성들에게 독신으로 살더라도 자신이 성공하는 것과 성공한 남편과 결혼하는 것 중 어떤 것이 과연 여자의 최대 행복인가 설왕설래하던 시절에 많은 질문을 던졌다. 또한, 당시 기존 가치관을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이야기의 전개와 캐릭터에 몰두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언젠가 신달자 시인에게 시를 주로 쓰다가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질문한 적이 있다. “왜 갑자기 소설을 쓰셨어요?” 하자 “하하!!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요” 하면서 웃어넘겼다. 이 소설은 1989년 첫 출간 후 100만 부가 팔려나갔고 영화화되기도 했던 베스트셀러였다. 가끔 잡지 인터뷰에 비친 신달자 선생은 멋지고 당찬 분이었다. 리더십도 대단하신 분이라 전국 시인협회장 재임 시 시인들에게 십시일반으로 회비를 걷고 유관단체의 도움을 얻어 협회의 숙원이던 독립 사무실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신달자 시인은 많은 강의로도 유명한데 실제로 삶에서 신앙적인 체험을 나누어주며 고통을 통해 어떻게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 어려움을 극복했는지를 잘 알려준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부족함 없이 살았을 법한 신달자 시인의 고통스러운 인생 여정의 이야기를 들으며 신앙의 힘과 신비를 이해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신달자 시인은 돌아가신 정진석 추기경과 마지막으로 개인 인터뷰를 한 작가이다. 웬일인지 정 추기경님은 평소와 다르게 인터뷰를 끝내시고 시인은 물론 사진 기자들, 스태프 한명 한명과 웃으며 사진 찍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 신달자 시인은 2020년 7월 16일 정진석 추기경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다. 정 추기경과 삶과 신앙에 대해 나눈 신 시인은 “추기경님은 영혼의 밭을 갈며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키우고 거두는 농부와 같다”고 말했다. 서울대교구 제공




▶안녕하세요? 건강하게 지내고 계시죠? 신 선생님은 어떻게 처음에 입교하게 되셨나요?

(웃음) 제가 하느님을 알게 되는 과정은 조금 길 것 같네요. 저는 고향이 거창인데 그곳에는 100년이 다된 성당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에 고향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성당에 간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그쪽으로는 별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3학년 때 등단하고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작가로서의 길이 열린 셈인데, 생각하지 못한 어려움에 부딪히셨죠.

네, 사실 전 그때 이제 꽃길만이 내 앞에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모든 것은 바뀌기 시작했어요. 결혼하고 아이를 셋이나 낳았어요. 셋째 아이가 돌이 지난 후에 남편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때부터 남편은 중환자실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때가 1977년이었죠.



▶병원 생활을 하다 보면 병간호하는 분도 상당히 힘든데요.

중환자실은 정말 비참했어요. 밤사이에 사망하는 사람들도 많고, 큰 수술을 하고 밤새 아파 앓는 소리를 내는 사람이 많았어요. 중환자실은 하루 두 번밖에 면회가 안 되지만 사람들은 종일 중환자실 앞을 지키며 연신 까치발로 중환자실을 들여다보곤 했어요. 그런데 중환자실에는 사기꾼이 들끓었어요. 굿을 하고 안수기도를 받고 별일을 다 했고 돈만 빼앗겼어요. 그때 친구 어머니가 병원 앞에 성당이 있으니 답답하면 가보라고 했을 때 제가 물었어요.

“거긴 얼마에요?”

“아니야 돈 안 받아, 그냥 가보면 돼.”

이 말을 나는 그냥 흘려듣고 며칠 후 길을 걷다가 그곳이 혜화동성당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동안에는 그렇게 오가도 안 보였는데, 남편이 입원한 병원은 성당 근처의 고려대 전신 우석병원이었거든요.



▶우연히 성당을 가보시곤 어떻게 하셨어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성당으로 들어갔지요. 놀랍게도 첫눈에 들어온 것은 어린아이를 안은 여자 조각상이었어요. 나중에 성모상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젖먹이가 보고 싶었던 저는 성모상 앞에 계단을 올라갔는데 2층은 성당이었어요. 마침 문이 조금 열려있어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었어요. 전 살금살금 다가가 맨 뒷줄에 가만히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저 앞에 벽에 걸린 예수님이 고개를 들어 저에게 말했어요.

“그래! 다 안다, 그래, 다 안다.”

분명히 제 마음속에 나오는 소리를 저는 똑똑히 들었어요. 그때 전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내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거의 미치는 순간까지 가 있었어요. 지나가는 누구라도 붙잡고 울고 싶었으니까요. 그러나 내 비참한 상황과 갈가리 찢어진 마음을 누구에게도 입 열지 못한 그런 순간에 “아니 다 안다고? 두 번씩이나….” 전 그만 통곡하고 말았어요. 내 본심을 잘 아시는 분이 예수라는 그 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울음은 내 힘으로 그치지 않았어요.

그다음 날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 아침 면회를 끝내고 택시 타고 집으로 갔어요. 황급히 현관에 들어서면서 아이들을 부르니 안방에서 시어머니와 아이 셋이 “엄마!”하고 나오는데 전 정신이상이 생길 만큼 괴로운 광경을 목격했어요.

아이 셋이 모두 수두에 걸려 온몸이 검은 딱지와 흉터로 뒤범벅되었어요. 저는 거의 미치기 직전이었습니다. 신발도 못 벗고 방으로 들어가 아이 셋을 끌어안고 뒹굴고 한참 울다가 지쳐서 잠시 잠이 들었어요. 잠결인지 생시인지 모르지만 분명하게 혜화동성당에서 보았던 그 성모님이 나를 안고 하늘로 오르면서 미소를 띠셨어요. 다음날 남편은 의식을 찾았고 일반병실로 옮기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전 감동했고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허수아비 앞에서도 무릎을 꿇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어요. 그것이 성심이 아닐까요? 병원 옆 성북동성당 주임 신부님이신 박귀훈 신부님이 병실에 자주 오셨어요. 1977년 11월 11일 11시 퇴원하는 날 성북동 성당에서 저희 부부는 세례를 받았어요.

<계속>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 허영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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