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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교의 자유 얻기 위해 무력 사용도 고려한 페레올 주교

조선 선교의 자유 얻기 위해 무력 사용도 고려한 페레올 주교

[신 김대건·최양업 전] (45)페레올 주교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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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1 발행 [1660호]
▲ 페레올 주교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두만강을 통한 조선 입국에 실패하자 무력을 통한 선교 자유를 희망했다. 사진은 에리곤호와 동급의 프랑스 프리깃함.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경원 개시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다. 둘은 왜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국경을 넘지 못했는지 분석했다. 겨울철 만주 벌판을 지나 훈춘까지 가는 여행길이 얼마나 험하고 위험한지 김대건 신부는 직접 체험한 바 있다. 페레올 주교도 당시 김대건 부제가 쓴 훈춘 여행기를 읽고 간접적으로나마 잘 알고 있었다. 둘은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산적에게 피습을 당했는지, 호랑이나 들짐승의 먹잇감이 됐는지, 관헌들에게 잡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가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의 생사를 확인할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메스트르 신부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그들의 생사를 확인해줄 서신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동지사 일행으로 북경으로 간 김 프란치스코 등 조선 밀사가 그들의 생사를 직간접으로 확인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한편, 1846년 2월 중순 두만강 국경 도시 훈춘에 도착한 뒤 중국 관헌에 체포되었다가 3일 만에 풀려난 후 국경을 넘지 못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출발지였던 소팔가자 교우촌으로 가지 않았다. 메스트르 신부가 조선 입국 실패 소식을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 알브랑 신부에게 전한 1846년 3월 3일 자 편지를 몽골에서 쓴 것이 그 증거이다. 둘은 요동대목구장 베롤 주교가 있는 양관이나, 페레올 주교가 조선대목구 부주교로 추천한 베르뇌 신부가 사목하고 있는 차쿠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있다. “메스트르 신부는 요동의 동료들에게로 돌아왔다. 그 무렵 만주에서 선교사로 있었고, 그와 한때 동행하였던 베르뇌 신부의 편지에 의하면, 메스트르 신부와 조선인 부제 토마스는 요동대목구의 학교에서 곧 모집할 수 있었던 몇몇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1846년의 한 해를 보냈다고 한다. 메스트르 신부는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으니, 이 학교 일을 보살피느라고 한동안 과중한 책임을 졌던 브노 신부가 그 지방의 일부를 열성으로 성과를 올리며 순회하고 성사를 줄 수가 있었다.”(하권 99쪽)

메스트르 신부 역시 “지난 3월에 조선 국경의 한 장소에서 제가 체포되고 그 결과 제가 돌아와야 하였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올해에 (페레올) 주교님이 준 소식은 매우 위안적입니다. 곧 오는 12월에 밀사들을 변문에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가 이 기회를 이용할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베르뇌 주교는 올해에 입국하지 못할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이미 여기에 있는 1명의 학생에다 또 2명이 그에게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3명이 라틴어를 배우고 있는데, 저는 (최양업) 토마스와 같이 베롤 주교가 돌아오면 달리 배치할 것을 기다리며 그들을 돌보고 있습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6년 6월 1일자로 몽골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참조)라며 자신과 최양업 부제가 베르뇌 신부 사목지에 머물면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메스트르 신부의 이 편지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페레올 주교가 그 해 말 자신과 최양업 부제를 입국시키기 위해 압록강 변문으로 사람을 보내겠다고 알려온 내용이다. 이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왜 조선에 입국하지 못했는지, 또 그들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페레올 주교가 알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길림 소팔가자 교우촌으로 가지 않은 이유가 이 대목에서 밝혀진다. 둘은 심양이나 압록강 국경 근처로 가서 동지사 일행으로 북경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김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조선 교회 밀사와 만나 그간의 일들과 국경 인근 베르뇌 신부 사목지 차쿠나 베롤 주교가 있는 양관에 머물 것이라고 알려줬을 것이다. 이러하다면 페레올 주교는 3월 말이나 4월 초에 돌아온 조선 밀사를 통해 그간의 사정을 소상히 알게 됐을 것이고, 4월 12일 주님 부활 대축일 다음날 곧바로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선교사 입국을 위한 해로 개척에 나선 정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페레올 주교의 좌절과 유혹

1846년 2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의 조선 입국 실패는 둘만의 좌절이 아니었다.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자신의 실패이기도 했다. 페레올 주교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입국에 성공하면, 조선 선교사들의 입국 경로를 ‘두만강 루트’로 정례화하려 했다. 페레올 주교는 2년 후에 조선으로 파견될 2명의 선교사도 이 루트를 통해 들어오게 하고 싶었고, 베르뇌 신부도 일정을 앞당겨 두만강을 건너게 하려 했다. 하지만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두만강을 건너지 못함에 따라 페레올 주교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다시 감시가 삼엄한 압록강 변문을 이용해 선교사들을 데려오는 방법뿐이었다.

좌절을 경험한 페레올 주교는 뿌리치기 힘든 달콤한 유혹에 빠진다. 힘으로 조선을 무력화시키려는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만일 신부님께서 세실 함장이나 혹은 다른 함장이 우리 동료들을 살해한 데 대한 해명을 요구하러 조선에 올 결심을 하게 만들 수 있다면 인류와 종교에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영국 해군은 떠나면서 내년 음력 3월에 다시 오겠다고 예고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는데, 좋은 위치를 점령하면 더욱 좋겠지요. 조선의 백성은 여전히 정말로 야만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교를 통해 문명화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용서받을 것입니다.”(페레올 주교가 1845년 12월 27일 한양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가 말한 영국 해군은 자신과 다블뤼ㆍ김대건 신부 그리고 조선 신자 11명이 타고 온 라파엘호가 제주도에 표착하기 3개월 전인 1845년 6월 25일 우도에 나타나 7월 15일까지 제주도 연안을 측량하고 돌아간 영국 군함 사마랑호를 말한다. 사마랑호는 이후 거문도와 다도해 일대 수심을 측량하고 다시 우도로 돌아와 7월 말께 일본으로 갔다. 이 일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해안 경비가 강화됐고, 한양으로 들어오는 모든 배를 엄격하고 세밀하게 검문했다.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페레올 주교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곧 선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선 무력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페레올 주교는 또 1846년 9월 6일자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그들(프랑스 군함)이 온다면, 우리 동료 신부님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요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왕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라고 강요하기를 바랍니다. 또 다른 좋은 수단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북경의 재중국 영사의 중재를 통해서 중국 황제에게 간청하는 것입니다. 조선의 왕에게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조용히 내버려두라고 경고하도록 말이지요”라고 청했다.

페레올 주교의 이러한 의식은 비단 그만이 갖고 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서양 선교사들의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선교와 신앙’은 인간의 기본권이며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가치로, 이 양심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무력을 사용해도 된다는 집단적 지성과 제국주의적 인식이 선교사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인간 구원을 위해서라면 선교에 방해되는 원주민들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학살해도 된다는 그릇된 인식을 하고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이러한 사조는 김대건과 최양업에게도 자연스럽게 이식됐다. 그러나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ㆍ최양업은 무력을 선교에 활용하지만, 제국주의의 궁극 목적인 정치적, 상업적 야심 때문에 선교의 순수성을 훼손하거나 복음 선포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페레올 주교의 이러한 인식은 얼마 후 자신처럼 아끼던 김대건 신부를 죽음으로 내몰고 만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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