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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가 중요

‘어디’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가 중요

[미카엘의 순례일기] (66·끝)순례의 은혜로 인도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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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8 발행 [1661호]
▲ 순례자들이 로마의 성 계단 성당에서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며 기도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빌라도 총독 관저에 있던 이 계단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가 326년 로마로 옮겨 놓았다고 전해진다.



“같은 곳을 자주 순례하면 지겹다고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길모퉁이의 어느 구석진 담벼락에 새겨진 낙서까지도 눈에 익고, 이스라엘 카나의 길거리에서 엽서를 팔던 조그마한 아이가 작은 카페의 주인으로 성장해 석류 주스를 파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으니, 그런 물음이 드실 만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순례란 ‘장소’가 아닌 ‘사람’에 대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순례지라고 부르는 장소들은 예수님을 포함한 ‘사람들’이 태어나 살았으며 죽었던 곳들을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순례지들은 그저 텅 빈 공터, 오래된 집, 아름답고 험한 산, 버려진 마을로 남았을지도 모르지요.

때문에 그곳을 순례하는 일 또한 ‘어디’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가 중요합니다. 지도 신부님은 물론, 함께 걷는 동반자야말로 순례의 모든 것입니다. 누군가의 너그러움이 큰 상처를 딛고 일어선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거나, 어려움 속에서도 환히 웃으며 오히려 동료를 보듬는 분을 만나는 것은 성지에서 만나는 귀한 은총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저는 똑같은 곳을 아무리 여러 번 간다고 해도 전혀 지겨웠던(?) 적이 없습니다. 매번 같은 장소를 언제나 다른 분들과 함께하는 그 길이 행복했을 뿐입니다.

오래전부터 저를 매우 아껴주셨던 순례단과 함께 한 잊을 수 없는 시간이 있습니다. 여전히 서로 안부를 전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고 있는, 저를 인솔자가 아니라 순례단의 일원으로 대해주시는 분들이십니다. 그중 웃는 모습이 아름다우셨던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웃음만큼 눈물도 많으셔서 슬픈 이야기를 시작하면 금세 눈가가 젖어오셨지요. 그 자매님께서 암에 걸리셨습니다. 발견이 너무 늦어 이미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직장을 그만두고 공기 좋은 시골로 함께 내려가셨고, 오직 자매님 곁을 지키며 돌보셨습니다.

그렇게 한두 해가 지나자 자매님의 건강이 조금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순례단은 한 번 더 순례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행선지는 이탈리아였습니다. 모두 그것이 자매님의 마지막 여행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 자매님을 위주로 돌아갔습니다. 되도록 여유 있는 일정을 만들었고 비록 성지순례이기는 하지만 중간중간에 아름답고 예쁜 관광지도 여럿 포함시켰습니다. 자매님께서도 나머지 분들의 배려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주시며, 힘드실 텐데도 늘 웃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순례가 끝난 후, 자매님께서 공항에서 저를 불러 악수를 청하시고는 그동안 감사했다며 손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다음에 더 좋은 성지에 같이 가야 하니 꼭 병을 이겨내시라고 말씀드렸지만, 자매님께서는 웃기만 하셨지요. 이제 그분은 하느님 곁으로 올라가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그 이탈리아 순례 중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란, 오늘 막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내일은 없는 것처럼, 오직 지금이 유일한 것처럼 서로 사랑을 고백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제의방에 자주 붙어 있는 글귀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여! 당신의 첫 미사인 것처럼, 당신의 마지막 미사인 것처럼, 당신의 유일한 미사인 것처럼 이 미사를 봉헌하십시오”라는 말을 흉내 낸 것이었습니다.

전 세계를 휩쓴 팬데믹에서 이제 조금씩 회복하고 있는 지금, 순례를 떠나지 못했던 시간 동안 지나온 나날들을 생각해봅니다. 앞서 말했듯 순례란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어느 곳을 가느냐는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 내가 있는 이곳에서, 오늘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성지이며 그 시간 전부가 순례일 테지요.

어느새 이 글을 연재한 지도 1년 반이 되어, 여정의 끝이 다가왔습니다. 애초 계획보다 긴 시간 동안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독자분들의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순례의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또한 그분들의 진실한 이야기를 서툴게 전했던 부족한 글솜씨에 사과드립니다. 미처 글로 담지는 못했으나 지난 세월 동안 저와 함께 걸었던 모든 순례자분도 늘 기억하며 기도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그간 글을 통해 저와 함께 걸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면으로나마 함께 순례를 떠날 수 있어 무척 행복했습니다. 매일 자신만의 순례길을 걷고 계시는 모든 분을 위해 기도하며, 저도 제 앞에 펼쳐질 새로운 길을 주님께 의지해 걸어가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저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이 순례 동안에 항상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게 하시고 서로 사랑하게 하시며,

앞으로의 모든 날이 이 순례의 은혜로 인도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말씀의 진리 안에 사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순례자의 기도 中)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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