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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첫 사제 김대건, 칼을 맞고 거룩한 죽음을 맞다

조선인 첫 사제 김대건, 칼을 맞고 거룩한 죽음을 맞다

[신 김대건·최양업 전] (47)김대건 신부의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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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5 발행 [1662호]
▲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림은 탁희성 화백의 김대건 신부 순교화.



이름: 김대건(우대건)

나이: 25세

출신: 중국 광동성 오문현(현 마카오)

종교: 천주교

압수 물품: 언문 소책자 1권, 붉은 비단 주머니 1개(성모자상과 예수성심상이 새겨진 무명 조각 2개가 들어있음).

특이 사항: 머리카락을 반쯤 잘라 기르지 않은 흔적이 있음.

진술 내용: 본래 중국 광동성 오문현 사람으로 성은 우(于)이고, 이름은 대건인데 그 고을에서 자랐다고 함. 부친은 죽었고, 모친은 살아 있으며 장가는 들지 않음. 15~16세 천주교를 배웠으며, 23세 때 상강(중국 호남성에 있는 강)에서 상선을 타고 요동에 도착한 후 갑진년(1844년) 11월 책문 변경에서 조선 지방을 보고자 언 압록강을 몰래 스스로 건너옴. 1845년 8월 한양에 도착해 황해도 산천을 유람하고자 마포로 나가 뱃삯을 치르고 임성룡의 배를 빌려 연평도에 들러 등산진에 이르러 이곳 진영에서 배를 압류하는 일로 소란을 일으키다 체포됨. 김대건은 스스로 국경을 넘어와 천주교를 봉행했고, 외국 선박과 서로 통함에 이르렀으니 이러한 죄에 하나만 해당해도 죽임을 용서할 수 없을 터인데, 여러 형구를 늘어놓고 반복해 힐문했으나 “천주를 위해 한 번 죽겠다”고 하면서 끝까지 자백하지 않고 있음. 외국 사람과 관련되었기에 갑자기 처단하기가 어려움.



칼과 수갑을 찬 채 한양으로 압송

김대건 신부를 문초한 황해 감사 김정집의 장계 주요 내용이다.

헌종 임금은 이 장계를 읽고 “기해년(1839년)에 사교를 다스린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또 이렇듯 외국인이 몰래 넘어왔다고 하니 어찌 분통함을 이기겠는가. 틀림없이 데려와 머물러 있게 한 무리가 있을 것이니 사건 전모를 조사할 방도를 비변사로 하여금 속히 아뢰고 처리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임금의 명령이 있자 좌포도청 군관 홍창린, 김진연, 홍창열, 우포도청 군관 김인철, 조민식, 이시영 그리고 군사 4명이 김대건 신부 일행을 한양으로 압송하기 위해 황해 감영으로 급파됐다. 이들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된 임성룡과 엄수, 그리고 뒤늦게 잡아들인 임성룡의 아버지 임군집, 김성서의 아버지 김중수를 포도청으로 압송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붉은 줄로 묶인 채 칼과 수갑을 차고 머리에는 거무스름한 천 자루를 뒤집어쓰고 한양으로 끌려 왔다.


▲ 김대건 신부는 포도청에서 서소문,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로 이송돼 순교했다. 사진은 새남터 순교성지.




문초 끝에 정체가 드러나다

1846년 6월 21일 포도청으로 이송된 김대건 신부는 다음날부터 40여 차례 문초를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포도청 심문에서도 황해 감사에게 한 진술처럼 중국인이라고 우겼다. 하지만 김 신부는 이틀도 못 가 신분을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김 신부가 중국 어선 2척에 맡긴 조선 지도와 편지, 그리고 페레올 주교의 보고서가 압수됐기 때문이다.

황해 감사 김정집은 김대건 신부를 중국인으로 의심해 손을 못됐지만, 임성룡과 엄수를 혹독하게 고문했다. 이 과정에서 임성룡은 김대건 신부가 중국 어선 2척에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를 전했다고 자백했다. 이에 김정집은 도내 각 지방관에게 비밀리에 관문을 보내 중국 배가 출몰하는 곳을 염탐해 김대건이 보낸 편지를 되찾아오게 명령했다. 이 명령을 받은 황해 수사 이명학은 부장 유상은과 역학 김용남, 장교 황길승 등을 보내 먼바다를 정찰하게 했다. 이들은 중국 배로 위장해 고죽포 먼바다로 나가 중국 배 5척에 다가가 밀무역 상인이라며 개가죽과 환약을 주고 포구로 와서 거래를 하자고 유인했다. 중국인 뱃사람 중 10명이 이익을 탐해 육지로 오르자 포교들은 이들을 체포해 3명을 풀어주며 김대건이 전한 편지를 찾아오면 나머지 7명을 석방하겠다고 윽박질렀다. 이들은 5월 25일 오후 1~3시경 다시 와 등주에서 온 배 한 척에서 김대건의 편지를 찾았다며 포교들에게 지도 1장과 페레올 주교가 쓴 라틴어 보고서 6장을 전했다. 포교들은 이번에는 다시 김대건이 장연 목동에서 중국 어선에 전한 편지를 찾아오면 모두를 풀어줄 뿐 아니라 후한 상을 주겠다고 타일러 보냈다. 그러자 중국인 어부 2명은 다시 가서 지도 1장과 김대건 신부가 쓴 편지를 찾아왔다. 이 편지와 보고서, 지도 2장은 곧바로 헌종 임금에게 전달됐다.

라틴어 보고서는 임금과 대신은 물론 역관조차 읽지 못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에게 편지 내용을 밝히라고 문초했고, 김 신부는 교회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그 내용을 얼버무려 알려줬다. 지도와 주교의 보고서, 자신의 편지까지 모두 압수된 것을 안 김대건 신부는 6월 23일 6번째 공초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저는 본래 외국인이 아니고 조선의 용인 땅 태생으로, 성은 김이고, 이름은 재복입니다.…”(「일성록」 병오 5월 30일 참조)



조정은 발칵 뒤집어지고 프랑스 군함까지

조정은 김대건이 서양말을 배우고 신부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보내졌던 조선인 소년 3명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발칵 뒤집어졌다. 임금은 김대건 신부와 연루된 신자들을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이에 현석문(가롤로), 남경문(베드로), 한이형(라우렌시오), 김임이(데레사), 이간난(아가타), 정철염(가타리나)가 체포됐다.

설상가상으로 1846년 8월 6일 세실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 3척이 충청도 홍주 앞 외연도에 나타났다. 페레올 주교가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세실 함장이나 혹은 다른 함장이 우리 동료들을 살해한 데 대한 해명을 요구하러 조선에 올 결심을 하게 만들 수 있다면, 인류와 천주교에 크게 이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페레올 주교가 한양에서 쓴 1845년 12월 27일자 편지 참조)라고 요청한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세실 함장은 조선 정승(영의정) 앞으로 보내는 한문 서한을 8월 9일 조선 측에 전달하고, 10일 조선을 떠났다. 세실 함장의 편지에는 1839년 프랑스 선교사 살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다음 해에 회신을 받으러 오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 새남터 형장에 버려져 있던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신자들의 손에 의해 거둬져 와서, 왜고개에 임시 매장되었다가 안성 미리내에 안장됐다. 사진은 미리내 성지내에 있는 성 김대건 신부(왼쪽)와 페레올 주교의 묘소.



새남터에서 처형, 순교

김대건 신부는 프랑스 군함이 조선 연안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곧 석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 신부는 함께 갇혀 있는 신자들에게 “이제 우리는 사형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신자들은 “그럴 말한 일이 생겼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김 신부는 “여러 척이 프랑스 군함이 조선에 와 있는데, 주교님과 안 신부(다블뤼)는 틀림없이 우리의 처지를 알려 줄 것이다. 나는 세실 함장을 알고 있으니, 그분은 틀림없이 우리를 석방시켜 줄 것”이라고 답했다. 김대건 신부의 추측대로 페레올 주교는 프랑스 군함이 조선 연안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함장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러나 주교가 군함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그들이 떠나고 없었다.

프랑스 군함의 출몰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영의정 권돈인, 우의정 박회수, 예조판서 조병현, 병조판서 김좌근, 좌참찬 김흥근, 수원 유수 이약우, 지돈녕부사 이헌구 등이 1846년 9월 15일 창덕궁 희정당에 나아가 임금에게 “프랑스 오랑캐와 소통한 사악한 김대건 무리의 죄를 물어 빨리 처분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헌종 임금은 “천주교 죄인 김대건을 효수경중(머리를 베어 백성들을 경계토록 함)하라”고 명했다.

김대건 신부의 사형 집행은 다음 날인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있었다. 김 신부는 보라색 겹저고리와 중국 무명천으로 지은 홑바지를 입고 손발이 결박된 채 들것에 실려 형장으로 이송됐다. 이송 경로는 포도청에서 서소문을 거쳐 당고개에서 잠시 쉬었다가 새남터로 갔다. 형장에 도착하자 병사 한 명이 김 신부의 풀어진 상투를 다시 매어 주었다. 그런 다음 웃옷을 벗기고 양쪽 귀에 화살을 꿰었다. 이어 김 신부의 얼굴에 물을 뿌린 후 횟가루 한 줌을 뿌렸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 장면은 증언자마다 다르다. 서소문부터 따라가 김 신부의 순교를 눈으로 본 박순집(베드로)은 “단 두 번의 칼을 받고 참수됐다”고 증언했다. 목격자의 증언을 들은 최양업 신부의 동생 최(선정) 베드로는 “신부의 머리가 도끼에 잘려 떨어졌다”고 했다. 신자들로부터 김 신부의 순교 장면을 듣고 아주 자세히 편지에 묘사한 페레올 주교는 “8번 칼을 맞고 머리가 떨어졌다”고 기록했다. ‘8’은 성경에서 ‘새 출발’과 ‘부활’을 의미하는 수이다.

박순집의 아버지 박 바오로와 한경선, 나창문, 신치관, 이 요한 사도 등이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찾으러 그해 음력 10월 칠흑 같은 밤에 새남터 형장으로 갔다. 이들은 모래를 파고, 한쪽 손에 개에 물린 뚜렷한 자국으로 김 신부의 시신을 확인하고 홑이불로 감싼 후 약 1㎞ 떨어진 와서(瓦署)에 임시매장을 했다. 다음날 밤 몇 명의 교우들이 다시 김 신부의 시신을 파내어 왜고개로 옮겨 매장하고 장례를 지냈다. 이후 박해가 진정되자 신치관과 이민식 등이 왜고개 김 신부의 시신을 찾아 그해 10월 26일 미리내로 옮겨 안장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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