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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 노래 연습이 아니라 ‘소명 의식’과 ‘영성 교육’ 필요하다

성가대, 노래 연습이 아니라 ‘소명 의식’과 ‘영성 교육’ 필요하다

제언 /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 성가에 대한 논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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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5 발행 [1662호]
▲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필리핀 신자들이 교황 주례 미사에서 성가를 합창하고 있다. 【CNS 자료 사진】

▲ 교회 음악의 진수로 알려진 르네상스 시대 교회 전례용 무반주 다성곡(PolyPhony)을 연주하는 남성 합창단 ‘폴리포니 앙상블(Polyphony Ensemble)’의 공연 모습.



팬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다시 한 번 묻는다. 성가대는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현실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사목 현장에서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질지라도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은 바로 미사 전례이다. “전례는교회의 활동이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원천”(「전례헌장」 10항)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전례 거행과 교우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훌륭한 사제의 강론에서 교우들은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새 시간을 살아갈 힘과 위안을 얻는다.

우리가 미사 중에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소리는 주례자인 사제의 목소리이다. 어떤 어르신께서 도통 무엇을 강론하시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하자 어떤 본당 신부는 “영으로 들으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기도문을 읽고 복음을 선포하는 사제의 좋은 목소리, 말투나 어투, 발음을 비롯해 좋은 음향 시스템을 바탕으로 훌륭한 강론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줄 아는 능력이 사제에게 필요하다. 그래서 효과적인 강론을 위해 멀티미디어까지 활용하는 젊은 신부님들의 노력은 교회의 미래를 더욱 밝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팬데믹을 통과하며 큰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는 우리 교회에 이는 더욱 절박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 모든 사제가 대중 연설 훈련을 받거나 말씀의 은사를 받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교우들이 미사 중에 답답해 하거나 무미건조함을 느낄 때 바로 거기서 그들이 주님을 느끼며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보조적이며 효과적인 도구는 무엇일까? 성가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성가대의 영성(靈性, spirituality)이 비롯된다. 성가대는 그저 특송을 위한 합창단이 아니며, 전례에 있어서 ‘사목자의 협조자’인 것이다. 그래서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도 자의교서 「일부 직무」에서 품계 제도를 개정하면서도 성가 담당자를 굳이 직무자(Ministerium)에서 배제시키지 않은 것이다.

단순 봉사자(Volunteer)와 전례 직무자(Minister)는 분명 다르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어느 교구는 성가대 지휘자 및 반주자와 관계된 공문서를 본당에 발송하면서 이들을 아주 간단히 ‘자원 봉사자’로 분류해 버린 바 있다. 노동법과 관계된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사례비의 유무와 관계없이 이는 전례에 대한 지식과 의식 없이 그저 행정 편의적으로만 이들의 역할을 규정해 버린 아주 나쁜 예로 남게 될 것이다.

경신성사성은 「성음악 지침」에서 “성음악에 한 부분을 담당한 이들은 무엇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한다”(97항)고 말한다. 비록 수가 적더라도 아무나 성가대를 시켜서는 안 된다. 성가대에게 필요한 것은 ‘노래 연습’이 아니라, 전례에서 사목의 협조자로 부름 받았다는 ‘소명 의식’과 그에 합당한 ‘영성 교육’이다. 성가대 안에서 서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을 조장하며 사목자에게 골치 아픈 단체로 낙인찍히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이유도 이 영성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가대에 대한 사목자의 인식도 변화되어야 한다. 복사단이나 제대회와 달리 왜 이따금씩 성가대가 해체되는가? 성가대는 전례에서 사목자의 지도 아래 교우들을 기도하게 하는 데 필수적인 협조자요 동반자라는 인식과 존중감이 사목자들에게 필요하다.

따라서 당연히 성가대는 그에 합당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성체 분배 봉사자는 많은 교육을 받는다. 그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며 성체를 건네주기만 하면 되는, 그리 큰 수고가 드는 역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선발에 심사숙고하며 결코 짧지 않은 교육 과정을 거쳐서 심지어 ‘권한’까지 부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미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담당하는 성가대원에게는 어떠한 자격 여부도 요구하지 않는다. 노래만 잘하면 된다고 여기는 성가대원이 적지 않다. 전례 의식이 부족한 지휘자도 적지 않다. 이는 성가대에 대한 사제의 의식, 교회의 제도적 지원, 그리고 무엇보다 성음악에 대한 신학교의 빈곤한 교육과 관계된다. 혹자는 이로 인해 성가대원의 수가 대폭 줄어들 것을 염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독창이나 소수의 인원만으로 성가가 이루어지는 미사는 전혀 생소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소수의 정예요원으로 성가대를 탈바꿈시켜 보는 것은 어떨까? 노래를 부르며 무대에 서고 싶은 이들을 위해서는 노래 동아리나 노래교실을 만들면 될 것이다.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복음과 문화의 괴리는 틀림없이 우리 시대의 비극”(20항)이라고 밝히셨다. 지난 2007년 미래학의 대부로 불리는 미래학자 짐 데이토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류는 농업사회와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 사회 다음엔 ‘꿈의 사회’라는 해일이 밀려온다”고 단언한 바 있는데, 이는 5년이 지난 현재 소위 ‘한류’라는 것으로도 진행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사목 현장의 예술단체라 할 수 있는 성가대는 ‘성전 중심주의’와 ‘전례 중심주의’라는 고루한 틀을 벗어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교서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28항에서 “서로 사랑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하시며 “이것은 성찬례 거행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전례와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성가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성가대는 음악이라는 수단과 매개체를 통해 지역사회 문화의 복음화에 자신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질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는 자선 음악회나 노래 봉사 혹은 휴식처럼 여겨질 생활성가 노래교실 등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훈령 「교회의 복음화 사업에 봉사하는 본당 공동체의 사목적 회심」에서 “본당 사목구는 지난날과 같이 모임과 사교의 으뜸가는 곳이 아니기에 동행과 친교의 새로운 형태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14항)고 지적한 바 있다. 성가대는 이와 같은 여러 실천적 봉사를 통해 스스로 신앙의 기쁨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복음과 문화의 풍요롭고 창의적인 만남은 참된 발전으로 이어지고, 한편으로 하느님 말씀께서 인간의 역사 안에 강생하시어 이 역사를 쇄신”(4항)하시는 데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철 신부(가톨릭 성음악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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