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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순교 소식에 비탄에 빠진 최양업, 조선 입국마저 무산

김대건 순교 소식에 비탄에 빠진 최양업, 조선 입국마저 무산

[신 김대건·최양업 전] (48)최양업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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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2 발행 [1663호]
▲ 김대건은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사진은 가톨릭평화방송 TV 드라마 ‘성 김대건’ 중 김대건 신부의 처형 장면.



병오년, 박해의 피바람이 불다

김대건 신부가 붙잡히자 조정은 그를 도운 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1846년 5월부터 7월에 현석문(가롤로)와 김임이(데레사), 이간난(아가타), 우술임(수산나), 정철염(가타리나), 임치백(요셉), 남경문(베드로), 한이형(라우렌시오) 등 약 30명이 체포됐다. 이들 중 김대건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현석문이 3일 뒤인 9월 19일 새남터에서 참수 순교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20일 김임이, 이간난, 우술임, 정철염, 임치백, 남경문, 한이형은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이 사건을 한국 교회는 ‘병오박해’라 한다.

1846년 병오박해는 이전의 신유(1801)ㆍ기해(1839)박해만큼 규모나 여파가 크지 않았다. 다행히 체포된 이들이 혹독한 고문에도 서양 선교사들의 존재에 대해 발설하지 않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충청도 수리치골 교우촌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또 헌종 임금을 비롯한 조정도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확대할 마음이 없었다. 그 결과 교회 상황은 빠르게 안정되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사목을 재개할 수 있었다.

페레올 주교는 박해를 피해 은신하고 있는 동안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정리해 기록했다. 그는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지시로 현석문과 이재의가 정리한 자료를 기초로 1846년 9월 22일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썼다. 그리고 그는 1846년 11월 3일 수리치골 교우촌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바랑 신부에게 쓴 편지에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병오박해 9명의 순교자에 관한 약전’을 적었다.

페레올 주교는 이 편지에서 순교자 김대건 신부를 이렇게 애도했다. “저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듯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행복만이 그를 잃은 데 대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사제품에 오른 사람으로 현재까지 유일한 사람입니다.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은 덕분에 그는 자기 동포들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고력이 있었습니다. 그런 데다가 깊은 신앙심과 진실하고 순수한 신앙생활과 놀라운 설득력을 가진 그는 단숨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훌륭하게 성직을 수행한 그는 몇 년 동안 경험을 더 쌓았더라면 대단히 유능하고 매우 소중한 사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조선 태생이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에게 어떤 일을 맡겨도 그는 자신이 가진 성격, 방식, 지식으로 맡은 일을 잘해냈습니다. 대목구의 지금 상황에서 그의 순교는 엄청나고 거의 만회할 수 없는 손실입니다.”

페레올 주교는 또 1846년 11월 2일 수리치골에서 ‘성모성심회’를 설립했다. 조선대목구를 성모 마리아의 보호 아래 두어 박해 없이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바래는 마음에서다. 성모성심회는 1836년 12월 16일 프랑스 파리 승리의 대성당 주임 데쥬네프 신부가 설립한 성모 신심 단체로 최양업도 신학생 시절인 1843년 소팔가자에서 성모성심회에 가입해 회원으로 활동했다.



최양업, 조선 입국의 희망 품고 변문으로

한편,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1846년 12월 다시 압록강 변문을 통해 조선으로 입국할 계획을 세우고 ‘만주대목구’에 머물고 있었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38년 12월 11일 만주에서 내몽골 달단에 이르는 지역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해 ‘요동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베롤(Verrolles, 1805 ~1878) 주교를 임명했다. 그리고 교황청 포교성성 직속 선교 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에 선교와 사목을 위임했다. 교황은 1840년 8월 23일 요동대목구를 ‘몽골대목구’와 ‘만주대목구’로 분리했다. 교황은 초대 몽골대목구장으로 물리(Jo seph-Martial Mouly, 1807~1868) 주교를 임명했고, 프랑스 라자로회에 사목을 위임했다. 몽골대목구는 서만자를 기반으로 오늘날 내몽골과 장가구, 적봉 지역을 관할했다. 반면, ‘만주대목구’는 기존의 요동대목구에서 몽골대목구를 분할한 지역을 그대로 관할하고, 대목구 이름만 바뀌었다. 따라서 연재 중 시기에 따라 지역이 ‘요동대목구’ 관할이었다가 ‘만주대목구’ 관할로 나와도 혼돈하지 말길 바란다. 만주대목구는 크게 남만주와 북만주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남만주 지역은 주교좌 성당이 있는 요녕성 양관과 개주, 그리고 차쿠가, 북만주 지역은 길림성 장춘 인근의 소팔가자가 선교와 사목의 중심지였다. 최양업은 신학생과 부제 시절부터 사제품을 받고 1849년 12월 말 압록강 변문을 통해 조선으로 귀국할 때까지 만주대목구에서 주로 생활했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될 무렵인 1846년 5월에 페레올 주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오는 12월에 신자들을 변문으로 보내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다시 압록강 변문을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하라는 지시였다. 메스트르 신부는 1846년 6월 1일 몽골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같이 밝히면서 페레올 주교에게 조선대목구 부주교로 지명된 만주대목구 교황 파견 선교사 베르뇌 신부와 함께 있음을 알린다. “베르뇌 주교는 올해 입국하지 못할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이미 여기에 있는 1명의 학생에다 또 2명이 그에게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3명이 라틴어를 배우고 있는데, 저는 (최양업) 토마스와 같이 베롤 주교가 돌아오면 달리 배치할 것을 기다리며 그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순교자 행적 번역하며 슬픔 달래


1844년 3월 15일 중국 요동에 도착해 만주대목구 선교사로 활동한 베르뇌 신부는 1848년 이전까지 양관과 개주, 심양 아래에 있는 요양 사령(현 요녕성 요양시 태자하구 사령진)에서 사목했다. 따라서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1846년 3월 이후부터 12월까지 이 세 곳 가운데 한 곳에서 생활했다. 베르뇌 신부의 편지 발신지를 보면, 1844년부터 1848년까지는 주로 양관과 개주로, 1849년 2월 21일 자는 요양으로, 1849년 10월 15일과 20일 자는 차쿠로 나온다. 하지만 최양업 부제가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하기 위해 압록강 변문으로 떠나기에 앞서 1846년 12월 22일 스승이며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의 발신지가 ‘심양’으로 적혀 있어 정확한 거처를 지정하기가 어렵다.

최양업 부제는 이 편지에서 조선 입국에 대한 그의 기대와 설렘을 밝힌다. “우리가 무사히 조국에 입국했다는 소식을 신부님께 전한다면 이 소식을 듣고 반가워하실 신부님의 기쁨에 못지 않게 저에게도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기뻐 용약하는 마음으로 더 자유롭고 더 자세하게 신부님께 서한을 올리겠습니다.… 하느님의 풍부한 자비심에 희망을 갖고,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에 저를 온전히 맡깁니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압록강 변문에서 자신들을 데리러 온 조선 교우들을 만났다. 조선 교우들은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에게 병오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김대건 신부의 순교 사실을 전했다. 그러면서 삼엄한 경비로 조선에 입국할 수 없다고 했다. 최양업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조선에 들어갈 수 없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고, 친구가 순교했다는 비통한 소식에 경악한 최양업 부제는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다”고 슬퍼했다.(최양업 신부가 홍콩에서 1847년 4월 20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조선인 교우들에게서 페레올 주교가 쓴 편지를 전해 받았다. 그 편지 안에는 프랑스어로 기록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1846년에 순교한 9명의 약전」이 있었다. 메스트르 신부는 페레올 주교가 자신에게 쓴 편지도 받았다. 그 편지에는 “마카오 대표부로 가서 조선 원정을 계획하고 있는 프랑스 군함에 승선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홍콩으로 갔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1847년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최양업 부제는 파리외방전교회 홍콩대표부에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행적으로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부모와 동료를 잃은 슬픔을 달랬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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