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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자 수녀의 하느님 자취 안에서] 43. 아버지

[조경자 수녀의 하느님 자취 안에서] 43. 아버지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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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2 발행 [1663호]
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가로수마다 초록이 무성한 잎으로 옷을 입고 있었다. 여름이 올 것이라는 신호이다. 지난해 겨울부터 올봄 내내 비가 오지 않아 너무 가문 나머지 곳곳에 건조주의보가 내리고, 산불도 이어졌다. 비 소식이 있나 싶어서 기다렸지만 소나기가 지나갔나 싶은 빗줄기만이 봄을 틔워놓고는 이제 깜깜무소식이다. 논밭을 가는 농부는 지금 얼마나 애간장이 탈까? 논에 물도 채우지 못하고 못자리만 해놓은 농부의 울부짖음이 느껴졌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에 이 농부의 마음을 먹는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며 감사드리게 된다.

봄이 되면 나는 어느 계절보다도 아버지의 건강이 염려된다. 생명이 움트는 봄에는 온 우주가 그들을 위해 힘을 쏟아주고, 또 그들은 그 생명력을 받아들이는 때이기 때문이다. 혹여 집에서 전화라도 오면 가슴이 덜컹한다. 그런데 시골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올케언니로부터 소식이 왔다. 아버지의 건강상태가 안 좋다는 소식이었다. 이미 3년 전에 암 수술을 하셨던 터라 정말 잘 버텨주신다고 생각했는데, 92세의 연세로는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병원으로 옮겨지셨고, 결국 의사 선생님께서 가족 모두를 부르셨다. 3년 전에 아버지를 수술해주신 의사 선생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아버지의 건강상태를 돌봐주셨다. 의사 선생님께서 부르셨으니 모두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병원을 향하였다. 가족이 모두 모이자 간호사 선생님이 진료 중이시던 의사 선생님께 우리 가족이 왔다는 것을 알려드렸다. 우리는 진료실로 들어가게 되었고, 선생님께서는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아버지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요. 식사도 거의 못하시고, 기력이 너무 없으십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 의지도 놓으셨고요, 폐의 상태도 안 좋으십니다. 요양 병원이나 집으로 모셔가신다고 하셨지만 그냥 아버님은 제가 여기서 마지막까지 모시겠습니다.” 가족 모두는 이 말씀을 듣고 너무 놀랐다. 본래 친절하신 분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 아버지를 당신의 아버지처럼 모시는 그 모습에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몰랐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께서 마지막에 이르셨다는 슬픔에 눈물 흘렸고, 의사 선생님의 가족 같은 따뜻한 배려에 감사로워서 눈물 흘렸다. 코로나19가 해제된 듯 마스크를 벗고 있지만, 병원은 아직 긴장된 상태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은 처치실에 아버지를 모셔오게 해서 마지막으로 온 가족이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다 오지 못한 가족은 영상통화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하면서 가족이 함께하였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보시더니 “수녀님이 너무 기도를 많이 해줘서 나를 안 데려가시나 봐. 그런디 이제 나는 가야 되겠어”라고 말씀하셨다. 언니들은 아버지께 그런 말씀 마시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힘든 아버지를 그저 잡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아버지께 ‘힘내세요, 아버지’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 하느님 아버지께 ‘이제 저를 데려가 주세요. 제가 잠들었을 때에 조용히 데려가 주세요. 저를 이만큼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셔요. 그리고 주님의 기도 계속하셔요”라고 말씀드렸다. 막둥이 딸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어리광하고 또 잡고 싶었지만, 이제 주님의 평화 속에서 쉬게 해드려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내 말을 들으시자마자 주님의 기도를 하셨다.

수녀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나에게 늘 곁에서 지켜보시는 분, 침묵으로 조용히 지지해주신 분이셨다. 일일이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셨다. 그리고 나는 우리 아버지가 내 안에 늘 함께 계시고, 앞으로도 늘 함께 하시으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 생명이 움트는 봄, 자연스러이 숨을 돌려드리고 계신 아버지를 기억하며 주님의 평화를 기도드린다.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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