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이 여성에게 말하다

제18회 고통 : "왜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나요?"

재생 시간 : 26:32|2011-04-01|VIEW : 2,911

우리는 고통의 순간에 '왜?'라고 묻습니다. 무엇인가 한탄하고 원망하며 '왜?'를 찾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일 뿐입니다.그러다가 '하느님은 계신건가?'하며 하느님의 존재여부를 찾게 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하느님신비체험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마 전 작고하신 박완서씨는 한 때 아들을 잃고 매우 방황한 적이 있었습...

우리는 고통의 순간에 '왜?'라고 묻습니다.
무엇인가 한탄하고 원망하며 '왜?'를 찾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일 뿐입니다.
그러다가 '하느님은 계신건가?'하며 하느님의 존재여부를 찾게 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하느님신비체험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마 전 작고하신 박완서씨는 한 때 아들을 잃고 매우 방황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를 내던지고 화를 내며 몇 달을 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왜 나만 이런 고통을?"하며 예수님께 따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왜 당신이라고 그런 일을 당하면 안 됩니까?"하는 반문을 듣게 됩니다.
이 말은 고통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매우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당신이 나 같은 고통을 당했다면 그런 말을 어떻게 나에게 할 수 있어?"하며 더 큰 상처를 받고 대들겠지만, 박완서씨는 그 말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왜 나만 이런 고통을?"하며 질문하며 방황했지만 그 이후로 "왜 나라고 이런 고통을 당하면 안 되는가?"하며 새로운 반문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완서씨는 대단한 성찰을 이뤄낸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결국 고통은 '고통자체'에 있기도 하겠지만 그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고통을 당하는 우리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고통없음'이 아닌 고통과 통교하면서 그 고통의 의미를 깊이 있게 바라보고 성찰하여 고통과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닐까요?

성서 욥기에서 욥은 자신의 고통을 죄에 대한 벌로 단죄하는 모든 것에 맞서 도전하면서 "왜?"라고 묻습니다.
물론 하느님 역시 욥의 의로움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욥의 '왜?'에 대하여는 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욥은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을 뵙게 된 욥은 더 이상 자신의 고통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을 만난 그 신비체험만으로 충분하기에 고개 숙여 참회합니다.

우리는 쉽게 한탄합니다.
"주변을 보라! 온갖 비리와 부정으로 사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데 혈안이 되어 살면서 2세 3세까지 그 부를 누리고 사는데, 우리는 무엇인가?
이웃에게 봉사하고 법 없이도 충실하게 살아가는 우리네는 왜 이렇게 늘 가난하고 게다가 몹쓸 병까지 얻어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가?
도대체 하느님은 계시기는 한 건가?"

그런데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께서는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는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고통은 신비입니다.
우리가 보내는 사순 시기는 40일간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회개의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살레시오 성인은 "우리의 단식은 단지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나 마실 것을 빼앗는 행위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기보다 무엇을 더 많이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십시오."

특별히 이번 사순시기에는 평소에 이웃에게 무관심했던 사람은 이웃봉사를, 평소에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조금 더 친절하게, 평소에 누군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화해를 하면서 거룩한 사순시기를 보냈으면 합니다.
'무엇인가 하지 않는'이 아닌 '무엇인가 하는'으로 전환하여 적극적인 노력으로 주님과의 수난에 동참하는 덕행이 곧 살레시오적 영성이라 하겠습니다.